[미술평론 독립큐레이터 황정인] 장재철의 미답의 공간을 끌어안은 신체의 궤적
- 독립큐레이터 황 정 인 -
장재철의
미답의 공간을 끌어안은 신체의 궤적
공근혜 갤러리 Time Space 29 x 214 x 20(h)cm. Canvas Relief. 2013
단단함이 느껴지는 견고한 형태. 빛으로 반짝이는 표면을 가로지르는 날렵한 선이 흡사 미답의 장소에 남기는 최초의 발자국처럼 화면에 흔적을 남긴다. 휘어진 가장자리와 표면에 뾰족하게 맺힌 꼭지점의 형태를 보아하니, 분명 눈앞에 걸려있는 덩어리의 안팎으로 팽팽한 힘 대결이 펼쳐지고 있는 상황임에 틀림없다.
장재철은 원호형태의 유연한 곡선으로 재가공한 캔버스 위에 천을 덧대고, 플라스틱 재질의 도료를 수십여 차례 발라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기를 반복하는 노동집약적 과정을 거처 하나의 완결한 형태를 만들어 낸다. 지지대와 천을 덧대어 만든 기본 재료에 칠을 하여 완성한 형태를 최종적으로 벽에 거는 과정만 보면 전통적인 회화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그것의 평평한 표면이 내부의 보형물로 하여금 장력을 유발하여 표면이 찢겨 나가기 직전까지 앞으로 돌출된 형
태를 보면 은근히 긴장감이 감도는 반입체인 부조의 형상을 취한다. 그러한 점에서 그동안 그의 작업은 조형적 특징으로 인해 회화의 평면성을 추구해온 모더니즘의 환원주의적 태도와의 연결선 상에서 해석 가능한 여러 단서들을 제공해왔다. 이는 비단 작품을 이루는 재료의 물성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가 고수하는 표현방식을 통해 관객은 구체적인 형상 대신 단순한 곡선의 균형 있는 조화 안에서 순수하고 추상적인 형태가 불러일으키는 미적 감흥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인정하는 가운데, 몇 가지의 의문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지지체와 천이라는 회화의 물리적 요소를 작품의 주재료로 취하면서, 왜 하필 그는 보통의 캔버스 지지대가 가지고 있는 직선의 형태 대신 곡선을 선택했을까. 그가 취한 곡선 역시 천천히 눈여겨보면, 과감하지 않고 은은한 궤적을 그리고 있으며 보이지 않는 원형의 궤적 안에 속해 있는 작은 호를 연상시킨다. 그래서인지 작품의 가장가리에서 호의 끝부분에서 이어지는 연장선들을 마음속에 그려보면, 어느 샌가 커다란 두 서너 개의 원이 덩어리 형태의 작품 주위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듯한 환영이 모습을 드러낸다. 실제로 작품의 가장 중요한 형태를 만들어 내는 원호형상의 나무지지대는 작가의 신체 궤적이 남긴 하나의 자취이다. 175센티미터의 신장을 반지름으로 하는 원의 둘레가 곧 작품 속 각 변이 속해 있는 전체 자취가 되는 원리이다. 2010년 이후 그의 작업에서는 유독 이전보다 폭이 좁아진 형태의 작은 조각들이 짝을 이뤄 등장한다. 그 모습을 보면 하나가 볼록하면 다른 하나는 오목한 형태를 취하며 서로의 관계를 규정짓고 있는 상황을 연출한다. 하나의 독립된 형태 안에서 완결성을 획득했던 과거의 작업이 최근에 와서는 형태의 물리적 특징들로 하여금 주변의 공간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면서 그것의 존재감을 더욱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캔버스라는 인식을 넘어 자족적인 존재성을 지닌 사물(고충환)’이 이제는 사물 자체의 존재성에만 그치지 않고 외부세계와의 조응관계라는 또 다른 의미를 획득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장재철의 작업에서 나타나고 있는 호형태의 곡선들이 신체의 자취가 남긴 궤적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염두하고 작업을 바라보면, 그의 작업은 외부세계에 자신의 존재를 규정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에서 출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투명한 공기로 둘러싸인 세상 속에서 신체가 지닌 물리적 속성을 가장 손쉽게 시각화하여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찾은 것이 이러한 원호형태의 곡선이 아닐까. 비행기에 달린 유선형의 날개가 창공을 가르고, 눈 덮은 산 정상에서 스키를 장착하고 설원을 날렵하게 질주하여 내려오듯, 그의 작업에 나타난 곡선의 형태는 전체를 가늠할 수 없는 무한세계를 향해 굳은 의지로 단호하게 존재를 드러내는 최소한의 표식과도 같다. 실제로 유년시절부터 모형비행기를 취미로 즐겨 만들어 온 작가는 비행기의 날개구조가 캔버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 지금의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 중 하나라고 고백한다. 견고한 틀을 지지체로 하여, 질긴 천을 막처럼 덧씌우고 그것의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 도료를 얹히는 작업과정을 생각해보면 그것이 비행기의 날개를 만드는 원리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러한 비행기 날개의 견고하고 날렵한 형태는 본래 외부세계에 대한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형상이다. 장재철의 작업이 바로 의미를 지니게 되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틀과 막의 유기적인 구조로 탄생한 형태적 유사성 너머로 그러한 형태가 진정한 의미를 지니게끔 만드는 외부세계, 공간과의 관계가 하나의 해석적 요소로 그의 작품에서 새롭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표현적 특징 중 하나는 안에서부터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보형물이 지지체에 씌워진 막과 같은 형태와의 관계 속에 조성하는 묘한 긴장감이다. 지지체와 표면 사이에 밀고 당기는 장력으로 인해 팽팽한 탄성이 형성된 가운데, 작가는 여기에 긴장감을 최고조로 불러일으킬 수 있는 형태를 망설임 없이 삽입한다. 표면에 상처를 내지 않으면서 칼날처럼 날카로운 구조물이 캔버스의 뒷면에서 앞으로 뻗어 나와 천이 찢어지기 직전의 극한의 상황을 연출하면서도 적절한 형태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은 오랜 시행착오의 결과 얻어진 그만의 노하우이기도 하다. 이렇게 완성된 단호한 표현은 평면이었던 표면을 안과 밖의 경계가 자리한 실재적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또한 포물선 형태로 돌출된 선은 표면 위에 자연스레 높이의 고저를 부여하여 빛의 반사에 따라 시시각각 느낌이 변화하는 상황을 만든다. 그의 작품에서 시공간과의 관계를 시각화하는 첫 단계인 것이다.
두 번째 관계는 작품이 백색의 평평한 벽으로 이뤄진 공간과 맺는 상호구조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바닥이 평편한 지지체로 이뤄져서 벽에 걸릴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다. 벽에 걸린 작품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비틀어진 사각형의 네 변을 이루고 있는 원호 형태의 면이 원주율의 법칙에 따라 새하얀 벽면에 보이지 않는 임의의 선을 생성한다. 그 형태를 미루어 짐작해보면, 하얀 벽면에 가상으로 그려진 커다란 네 개의 원이 있고, 원들의 둘레가 서로 부딪히거나 겹쳐져 만든 네 개의 면이 원둘레의 일부를 간직한 호가 되어 작품 안에서 단단한 형태의 네 변을 이루는 형국이다. 형태가 공간을 끌어안거나, 공간이 형태를 품고 있는 상황이 벌어진다. 여기서 네 개의 각 면을 이루는 호는 동일한 반지름 안에서 그려진 호가 각기 다른 길이로 표현된 것이기 때문에, 움푹 들어간 면은 그와 반대로 볼록 튀어나온 면과 완벽하게 만나면서 크고 작은 부수적 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장력이라는 물리적 특징이 서로 다른 두 가지 요소간의 긴밀한 관계에서만 성립이 가능한 것이라고 할 때, 그의 작품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안과 밖, 작품과 작품 외적인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 구도가 조성하는 심리의 한 형태를 반영한다. 즉, 그의 작업은 시공간(세계)이라는 외적 요소를 인식한 작가의 심리적 반응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처럼 독립적인 사물처럼 존재했던 형태는 각각의 변에서 연장되는 자취로 인해 비가시적인 형상들과 만나면서, 무의미하고 막연했던 공간에 분명한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장재철의 작업의 일관된 제목이기도 한 시공(Time Space)의 개념이 작품 외적인 부분과 맞물려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순간이다.
한편 최근까지도 작가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완벽에 가까운 표면을 만들어 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표면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 순간은 그가 만들어 낸 단단한 표면 속에 영원히 머무른다. 흐르는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한 이러한 작가적 노력은 미술의 역사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영원성을 표현하기 위해 시간이 흘러도 색이 변치 않는 금과 보석으로 작품을 제작하고, 장인정신을 잃지 않고 절차탁마하여 얻은 탁월한 세공술을 바탕으로 저마다의 예술세계를 보여줬던 과거 예술가들의 정신은 시대가 흘러도 변치 않기 때문이다. 결을 더 매끄럽게 다듬고, 더욱 투명한 발색을 통해 색채의 깊이를 강구한 그의 노력은 공간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고려한 근작들의 반짝이는 표면 위에 녹아들어 있다.
장재철의 작품은 캔버스라는 기본 재료와 작품의 표현적 특징들로 인해 모더니즘 회화의 연결선 상에서 끊임없이 이야기되는 숙명을 지녔다. 하지만 그가 만든 단단한 형태와 색채, 이를 가능케 한 실존하는 신체의 궤적, 고된 노동의 시간을 통해 건져 올렸을 섬세한 표현들은 모더니즘의 원리 안에서 읽혀졌던 다양한 해석적 관점들이 작품 속에 나타난 유려한 곡선을 따라 다시 작가의 신체와 행위, 그가 추구한 이상향으로 선회하도록 우리의 눈을 인도한다. 또한 그의 작업은 작품 내부적으로 안팎의 경계를 통해 밀고 당기는 힘의 구도로 묘한 긴장감을 부여하거나, 외부적으로는 작품과 공간 간에 연결 관계를 성립시켜 다양한 심상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 섬세한 작업공정을 통해 얻어낸 극도의 완결성이 빛으로 반짝이는 표면과 견고한 형태의 가장자리에 더해지면서 그가 마음속 깊이 그리던 이상향의 세계, 샹그릴라(Shangri-La)는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아마도 장재철의 샹그릴라는 살아있는 신체의 자취가 세상을 향해 남긴 단단한 틀과 작가의 감성이 빚어낸 유연한 막의 결합이 만들어낸 순수한 형태와, 순간의 영원함을 갈망하면서 고된 노동 끝에 얻은 부드럽고 투명하게 반짝이는 표면이 시공간과 만나는 그 순간, 보이지 않는 그 어딘가에 머물러 있을 영원한 미답의 세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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