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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 ]

[미술평론 고충환] 추은영의 삶의 풍경, 웃음 뒤에 숨은 냉소 / 고충환

MEMORYWORKS 2014. 2. 18. 10:25

[미술평론 고충환] 추은영의 삶의 풍경, 웃음 뒤에 숨은 냉소 / 고충환


추은영 작가

삶의 풍경, 웃음 뒤에 숨은 냉소


제3의 물결 The Third Wave  

350x350x350 (cm) 

3D Animation & Installation 

2013


인간시장(2003). 인력시장? 제발 누가 나 좀 사가세요. 여차하면 손가락 빨게 생겼거든요. 보기엔 어떨지 모르지만 그래도 아직 이빨 하나만큼은 꽤 쓸 만하거든요. 입바른 소리가 아니라 남들 씹는 이빨이요. 게다가 말귀도 밝고 입도 싸서 남들 말을 잘도 옮기지요.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정도는 양반이지요. 당연, 줄 서기와 줄 대기는 기본이고요. 줄 한번 잘못 섰다가는 한 칼에 쪽박 차는 수가 있으니 조심하세요. 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만 그 와중에도 자신의 속내를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고요. 추은영은 <인간시장> 시리즈를 통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는 비법을 전수한다. 개구리로 희화화된 인간시장에서 인간들이 벌이는 이전투구가 비장하고 비겁하다. 냉소적이고 해학적이다. 목 조각에 결합된 키네틱을 주 무기로 한 투쟁이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형식적인 완성도를 더한다. 

그리고 Operate me(2007). 나를 작동시켜보라는 주문이다. 인간시장에서 작가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주목했다면, 이번에는 제도와 개별주체와의 관계에 포커스를 맞춘다. 나는 너무 수동적이어서 누군가가 나를 작동시켜주지 않으면 작동되지가 않는다. 왜 그런가. 제도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관성에 길들여졌기 때문이고 학습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제도는 내가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구분해주고,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학습된 내용을 내재화한다. 그래서 종래에는 굳이 제도가 나를 감시하지 않아도 내가 나를 감시한다. 이로써 작가는 마침내 스스로 알아서 작동하는(능동적인?), 사실은 제도의 욕망을 대리 수행할 뿐인 기계인간이며 로봇인간 그리고 제도적 인간으로 나타난 현대인의 초상을 그려 보인다. 

여기서 작동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개별주체를 작동시키는 제도의 시스템을 의미하고, 관객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상호작용 시스템을 의미한다. 키네틱이 목 조각과 어울렸다면, 상호작용 시스템은 3D 애니메이션과 결합하면서 더 잘 작동된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목 조각에서 3D 애니메이션으로 넘어간다. 단절되면서 넘어가기보다는, 직조와 영상과 설치를 하나로 아우르면서 넘어간다. 


이렇듯 추은영은 <인간시장>에서 개인과 개인과의 관계에, 그리고 <Operate me>에서 제도와 개별주체와의 관계에 주목한다. 사람에 관심이 있고,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흥미롭다. 그리고 근작에서 그 관심과 흥미는 상대적으로 더 디테일해지고 섬세해진다. 사람들의 세부를 파고들고 무의식을 파고든다. 

그렇게 들고 나온 주제가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이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이 구절은 이중적이고 역설적이다. 사뿐히와 즈려밟고가 부닥치는 것. 사뿐히 밟고 즈려밟아 달라는 주문이 충돌하는 것. 여기서 즈려밟다는 지르밟다의 시어이고, 짓밟다는 의미의 북한말이다. 결국 사뿐히 밟아달라는 주문과 짓밟아달라는(?) 주문이 포개지는 것에서 역설이 발생한다. 기왕에 밟을 양이면 사뿐히 밟아달라는 주문이다. 기어코 밟고 싶다면 기꺼이 밟히겠지만 살살 밟아달라는 주문이다. 완전, 블랙코미디가 아닌가. 웃음과 울음이, 냉소와 해학이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통합되는 어떤 차원이 열리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작가는 내가 될 수도 그리고 네가 될 수도 있는 사회적 약자들을 기어코 밟고 싶은 주체에게 내어준다. 그 주체는 제도가 될 수도 네가 될 수도 그리고 내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제도의 잠재적인 주체이면서 객체인 것. 나는 너의 잠정적인 아군이면서 적군인 것. 

작가의 근작에선 그런 물고 물리는 사람들의 초상이 펼쳐진다. 먼저, <제 3의 물결>에서 작가는 정보의 홍수에 휩쓸린 사람들의 초상을 보여준다. 세계 도처의 주요 신문과 잡지 그리고 웹 페이지로 도배가 된 영상에서 사람들이 그 사이사이로 내다본다. 도배가 된 영상으로도 부족한지, 영상 밖에서마저 실물 신문과 잡지 그리고 웹 페이지로 접어 만든 종이비행기가 영상 안쪽으로 날아든다. 이렇게 영상 안쪽과 바깥쪽이 온통 정보 천지다. 현대인의 의식과 무의식을 무차별 공격하는 쓰레기 정보들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거의 모든 정보는 쓰레기다. 정보가 지식을 대체하면서 지식은 깡통이 되었다. 그렇게 빈 깡통으로 전락한 지식이 도처에서 딸랑거린다. 더 이상 이면도 없고 행간도 없는, 다만 표면만 있는 시대의 거죽을 이 쓰레기 정보들이 그리고 깡통 지식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스쳐 지나간다. 작가의 작업은 이로부터 연유한 스트레스에 주목하게 한다. 

소통을 계기로 물결의 의미를 풀어 보자면 몸을 매개로 한 소통이 제 1의 물결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말과 문자를 아우르는 언어를 매개로 한 소통이 제 2의 물결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 정보를 매개로 한 소통이 제 3의 물결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제 3의 물결은 실물로부터 가장 먼, 어쩌면 아무런 실질적인 의미도 의미하지 않는, 다만 고도로 추상적인 의미만 실어 나를 뿐인 무미건조하고 중성적인 소통방식일 수 있다. 작가의 작업은 바로 그 소통방식의 비인간화 현상에 대해 곱씹게 만든다. 

그리고 <열쇠>에서 작가는 마음의 문을 닫아 건 사람들을 다룬다. 사람들은 왜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는가. 소통이 두려워서이다. 소통이 어려워서이다. 소통은 기술이다. 정보가 교환되고 의미가 전달되는 것은 소통이 아니다. 몸과 몸이 교환되고 마음과 마음이 전달되는 것이 소통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몸이 교환되지도 마음이 전달되지도 않는 현대인의 소통은 소통이 아니다. 현대인은 소통의 기술을 잊었고 잃었다. 이처럼 소통이 불통으로 변질되면서 그 와중에서 소외가 발생한다. 그리고 그 소외가 사람들 저마다로 하여금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게 했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몸과 몸이 교환되고 마음과 마음이 전달되는 구닥다리 소통방식을 복원하는 것이, 그리고 그렇게 잊었고 잃었던 소통의 기술을 복구하는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금 마음의 빗장을 열고 풀게 하는 해법임을 주지시킨다. 

그리고 작가는 <보이지 않는 공격수>에서 언어폭력을, 특히 인터넷 상에 떠도는 언어폭력을 다룬다. 영상에서 캐릭터들은 스스로 과녁이 되고, 그 과녁을 향해 화면 밖에서 날아오는 활자들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된다.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과녁을 맞히는 활자화살들에 캐릭터들이 전전긍긍해 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정작 그 이면에 탑재된 의미의 진실은 이런 웃음과는 거리가 멀다. 사람들은 쉽게 익명 뒤에 숨는다. 익명 뒤에 숨은 사람은 쉽게 사악해진다. 활자화살이 어디서 어떻게 날아오는지 모르는 것이 바로 익명 뒤에 숨은 무명인이며 보이지 않는 공격수를 암시한다. 사람들은 공공연한 폭력을 투사할 희생양을 욕망하고, 신상 털기로 까발려지고 내동댕이쳐질 마녀사냥을 욕망한다. 하루라도 누군가를 씹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친다. 그런 걸 보면 유감스럽게도 성선설보다는 성악설이 진실에 가깝다. 그래서 수신이 있고 수련이 있고 수양이 있는 거다. 그리고 작가는 영상 밖에 거울을 매달아 혹 그 공격수가 내 자신일 수도 있음을 주지시킨다. 

그리고 작가는 <탈출>에서 이런 무차별 공격으로부터 자기 속에 숨어드는 자아 혹은 주체를 보여준다. 세상으로부터 도피해 거대한 물고기 속에 숨는 것인데, 여기서 물고기는 저마다의 삶을 의미 있게 해주는 의미의 산실을 의미하고, 작가 개인적으론 창조의 산실을 의미한다(작가는 창작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이 작업은 니체의 전언을 상기시킨다. 니체는 쥐가 궁지에 몰리면 자기 내면으로 숨는다고 했다. 자기 내면 말고 달리 숨을 데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니체가 그 행위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기를 궁지로 내몰아라. 그러면 내면이 열릴 것이고, 그 내면으로부터 어쩌면 삶을 의미 있게 해줄 또 다른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주문이다. 그리고 이 작업은 요나의 신화를 닮았다. 세상 끝에 가서 자기를 전도하고 전파하라는 신의 명령을 피해 요나는 고래 배 속으로 숨는다(사실은 삼켜진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요나는 신의 명령을 수행한다. 여기서 고래 배 속은 거듭나기를 상징한다. 삶은 무의미하다. 이 무의미한 삶을 의미 있게 하기 위해선 삶을 탈바꿈시켜야 하고 스스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작가에게는 이처럼 거듭나게 해주는 계기가 창작이다. 이 작업은 너의 삶을 의미 있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거듭나게 해주는 계기는 무엇인지 저마다에게 물어온다. 

그리고 작가는 <희망사항>에서 꿈과 현실과의 거리감을 다룬다. 정도와 경우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사람은 현실에 대한 부정의식을 내재화하고 있다. 여차하면 꿈으로 도피할 준비며 태세가 갖춰져 있다. 꿈이 크면 현실이 견디기 힘들고, 현실에 맞춰 살면 꿈이 초라해진다. 꿈은 도피고 현실은 그 도피에 대한 처벌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현실을 살면서 현실을 부정한다. 보상심리다. 보상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졸지에 현실은 붕괴되고 삶은 금이 간다. 당신은 무엇으로 현실을 보상받는가. 작가가 꿈꾸는 보상은 다시금, 창작이다. 그럼으로써 창작은 곧 꿈꾸기임을 주지시킨다. 당신은 무엇을 꿈꾸는가.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저마다에게 되물어온다. 

그리고 오브제 작업 <레드오션>에서 작가는 종교를 다룬다. 알다시피 레드오션은 블루오션과 구별되는, 경쟁이 치열한 범주이며 영역이며 커뮤니티를 의미한다. 내세를 담보로 한 세속적인 장사와 내면의 스승을 자처하는 현대판 종교의 이전투구를 풍자한 것이다. 

이처럼 세상을 향한 작가의 시선은 냉소적이다. 그러나 정작 작업은 냉소적이지가 않다. 3D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된 캐릭터들이 냉소를 웃음으로 희화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냉소적이라는 것은 인간적이라는 말이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여차하면 기꺼이 세상을 보듬어 안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웃음 뒤에 숨은 냉소가 보이고, 세상을 껴안는 냉소의 품이 보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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